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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한강 역사교실
- 고구려 산성 문화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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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일시)
기본과정과 클럽과정으로
나누어 운영
(체험장소
및 체험내용)
1.
아차산성, 보루성
2.
오두산성 및 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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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내의
고구려의
역사문화유적지는
한강유역의
아차산성
및 보루성,
충주
고구려중원비,
단양의
온달산성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고구려는
19대
광개토대왕부터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펴고
20대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함께
한성백제를
멸망시키고
한강이남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24대
양원왕때
백제와
신라의
공격으로
한강지역을
빼앗기고,
다시
25대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에
의한
한강유역
회복작전이
실패한
이후에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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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보루성
발굴보고 |
아차산성
북장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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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보루성
외부모형 |
아차산성
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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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보루성
발굴형태 |
아차산성
수로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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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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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명왕(-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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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리왕(-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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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무신왕(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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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민중왕(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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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모본왕(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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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태조왕(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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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대왕(146~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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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신대왕(16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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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고국천왕(179~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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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산상왕(197~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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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동천왕(22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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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중천왕(248~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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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서천왕(270~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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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봉상왕(29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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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미천왕(3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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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고국원왕(33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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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소수림왕(37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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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고국양왕(384~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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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광개토왕(39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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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수왕(413~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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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문자왕(49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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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안장왕(519~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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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안원왕(53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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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양원왕(54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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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평원왕(559~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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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영양왕(5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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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영류왕(618~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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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보장왕(642~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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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차산성과 보루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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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백제 책계왕(286-304)때의
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온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공격하니
백제는 대방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맞섰다. 이때 고구려가 이 사실을
들어 백제를 원망하니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이곳 아차산성과 맞은편 풍납토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차산성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와 치열하게
다툴 때 다시 등장한다. 영락
6년(396) 병신에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백제 아신왕은
황급하게 남녀 포로 1천명과 가는
베 1천필을 바치고, 광개토대왕에게
무릎을 꿇은채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앞으로 영원히 대왕의
노예가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지난날의 미혹했던
허물을 은혜로써 용서하고, 그후에
순종하는 정성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대왕은 58개성과 마을
700을 빼앗고, 백제 아신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잡고
군대를 되돌려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그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때 군대를
철수하고 이곳 아차산성에 15개정도의
보루성(堡壘城)을 쌓고 백제군을
감시하고 압박하였다. 아차산성의
맞은편 구의동의 보루성도 고구려군이
쌓은 곳으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백제군을 감시하던 최전방 초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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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두산성과 통일전망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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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문]에
따르면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의
북군(北軍)은 한강 하류에 있는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키고
이곳 아차산성을 거쳐 위례성을
포위하였으며, 남군(南軍)은 위례성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북군과 합류하였다는
기록과 백제 관미성에 관하여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며 바닷물이 깊게 주위를
돈다.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다는 기록의 관미성이
오늘날의 오두산성으로 비정되고,
현재 오두산성의 초석은 거의
사라지고 통일전망대 입구 주변에
약간의 석성돌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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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왕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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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의 능비.
비신의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고구려의 건국 내력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 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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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중원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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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국보 제205호
소재지
: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
크기
: 높이 203cm, 폭 55cm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때문에 이 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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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달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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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은 사적 제264호로
지정된 곳으로 온달산성의 지명과 전설에 의하면 영토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투가 치열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바보온달 장군의 무용담과 함께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 되기도 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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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도
(강서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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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룡도(靑龍圖)(동) 화려한 색채로 묘사된 두 개의 뿔, 튕겨나갈 듯한 눈, 길게 내뿜은 혀.
몸통의 S자 곡선은 꼬리 부분에서 부드럽고 긴 여운을 남긴다. 용린(龍鱗·용의 비늘)은 섬세하다.
청룡은 하늘의 다섯 개 오관(五官·동 서
남 북 중앙) 중 동관(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태세신(목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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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무도(玄武圖)(북) 두 마리 뱀이 거북의 몸을 감싼 곡선은 힘찬
기상을 뿜어낸다. 뱀의 비늘과 선명한 거북무늬는 회화의 세련미와 원숙미를 보여준다. 현무는 북관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거북과 신령한 뱀으로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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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호도(白虎圖)(서) 주황색의 날개와
함께 백호의 용맹성을 드러낸다. 백호는 오관 중 서관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태백신(금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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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작도(朱雀圖)(남) 불길처럼 타오르는 깃털은 고구려인의 뛰어난 예술 감각을 보여준다. 아래의 붉은 산맥은 화면을 부드럽고 그윽하게 해 준다.
주작은 남관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붉은 봉황으로 표현됐다. 남방성수(南方星宿), 주조(朱鳥·붉은 새)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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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벽화(중앙) 중앙의 황룡은 태왕(太王·황제)의 신으로 토성을 상징한다. 황룡은 토성의 기운을 받아 세상을 관장하는
최고의 신으로 표현됐다. 맨 아랫단 인동무늬는 초록 띠를 둘렀으며 산악, 비천, 비운, 새를 탄 선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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