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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백제 역사교실
- 부여 역사문화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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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일시)
기본과정과 클럽과정으로
나누어 운영
(체험장소
및 체험내용)
1.
부소산성, 낙화암,
고란사
2.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5층탑, 부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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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성왕 - 31대
의자왕(538년 ~
660년, 123년) 사비백제시대의
역사와 문화관련
유적, 유물을
통하여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
특히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옆에서 발굴된
백제대향로 및 창왕
사리감 등
발굴된 각종유물을
통하여 당시의 백제의
문화적 수준과 국제적 위상을 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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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박물관 |
부소산성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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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
약수 |
창왕
사리감(국보
2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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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동 대향로(국보 287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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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대향로는 높이가 62cm나 되는데 대개의 향로가 20cm 안팎인 것과 비교해 유례가 없이 매우 크기 때문에 ‘대향로’이고, 청동으로 만든 뒤 수은
도말감법으로 도금을 했으므로 ‘금동’인지라, 국보 지정 명칭이 금동 대향로이다.
대향로는 뚜껑과 다리가 달린 몸체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로의 뚜껑 위에는 한 마리의
봉황새가 턱 밑에 여의주 구슬을 끼고 날개를 활짝 펴서 웅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뚜껑에는 74 곳이나 되는 봉우리가 나타나 있다. 향불의 연기가 피어나오는 곳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산봉우리 뒤쪽에 구멍을 뚫어서 만들었는데,
처음 주조할 때 만든 것과 사용하다가 뚫은 것도 있었다. 산봉우리 가에는 겨울에 낙엽진 나무 모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산에는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있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코끼리, 원숭이 등 39 마리의 동물과 피리, 비파, 소, 현금, 북을 연주하는 다섯 사람[奏樂像],
산중의 신선 등 16 사람의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다. 또 향로 몸체인 노신(爐身)을 싸고 있는 연꽃잎들에는 두 신선과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물속의 동물, 물 가의 생활과 관계 깊은 사슴과 학 등 26 마리의 동물이 표현되어 있어, 이 향로 전체에는 사람 모습이 18, 동물 65
마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 향로의 몸체를 이룬 박산(博山)은 중국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이상향인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한다. 또한 향로의 겉모양 꾸밈새는 연꽃이 만물을 상서로운 조화로서 탄생시킨다는 불교의 생성관인
연화화생(蓮華化生)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향로에 보이는 또 하나의 구성 원리는 음양의 원리다. 아래로부터 수중 동물, 즉 음(陰)의
대표격인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 몸체에는 연꽃과 물 속의 생물, 물 가에 노니는 동물들을 나타냈고, 뚜껑에는 땅 위의 세상인 산과 짐승,
신선을 나타냈고, 하늘인 꼭대기 짬에는 봉황새와 원앙새를 배치했는데, 봉황은 양(陽)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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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소산성, 낙화암, 고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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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은
백제
사비시대의
도읍성곽입니다.
현재는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으며
사비성,
또는
반월성이라고도
부릅니다.
현재
사적
5호이며,
흙과
돌로
쌓은
성곽입니다.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까닭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크게
2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의
기강을
쇄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웅진시대에
귀족세력에게
눌리어온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웅진의
지배권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배체제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이름까지
남부여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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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웅진(공주)의
지형이
협소하고
신라,
고구려의
세력을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왕은
백마강을
통해
서해로
빠질
수 있는
이곳
사비성에
부소산성을
쌓았습니다. 부소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만들어진
3중성입니다.
내성은
산봉우리를
테뫼식으로
둘러
쌓았으며,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포곡식으로
중성,
외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금강을
등지고
부소산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을
축성하여
시가지를
보호하였습니다.
평지의
도성(都城)과
산봉우리의
산성(山城)이
만나
천연의
요새를
이루었던
셈입니다. 660년
사비성이
무너진
뒤 이곳에는
슬픈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중요
무형문화제인
은산별신제는
663년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에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도침대사,
복신장군
등을
모시고
백제의
망국혼을
위로하는
제사의식이
3년마다
치루어졌습니다.
요즘은
해마다
대제와
소제로
나누어
7일동안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부소산성의
뒤쪽,
백마강변에
자리잡은
낙화암은
사비성이
무너졌을
때,
지조와
절개를
지키려는
백제
아낙들이
몸을
던져
죽은
곳입니다.
의자왕의
3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잘못된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기억속에서
지우고,
도성안에서
끝까지
저항하였던
백제여인들의
충절을
받들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머리숙여
그때의
역사를
생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고란사
뒷벼랑에
자생하는
고란초는
인동초와
함꼐
부여의
식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같은
굵기의
가느다란
잎자루에
잎사귀
하나가
전부인
고란초는
햇빛을
싫어해
습기가
많은
바위절벽의
틈새에서
자랍니다.
의자왕은
생전에
이곳
고란사의
약수를
즐겨
마셨으며
약수를
뜰때마다
고란초
잎사귀를
하나씩
띄우며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부여의
사람들은
지금도
낙화암
절벽아래
피어난
고란초는
망국의
한을
품고
죽어간
백제여인들의
넋이라고
믿습니다.
나약하지만
의연한
고란초에서
우리는
백제
여인들의
아름다움과
절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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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림사지 5층석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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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부처님의
진산사리를
모시는
곳입니다.
5층석탑이
있는
이곳은
1942년
발굴조사때
기와에
새겨진
명문을
발굴하여
1028년
고려시대에
절의
이름이
정림사(定林寺)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백제를
침략한
소정방이
그때의
사건을
탑비에
새겨둔
명문
때문에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림사터에서는
기와,
토기,
벼루는
물론이고
흙으로
빚어만든
도용(陶俑)이
90여점
출토되었습니다.
도용의
모습을
통해
이국적인
호인(胡人)과
국제교류를
하였던
백제인의
기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예술의
가치를
갖는
것은
장인들의
땀과
기술과
진솔한
믿음이
돌에
절절히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어우러져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의연한
모습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함
속에서
움직임이
있고,
절제된
균형미는
안정감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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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산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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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시대는
웅진시대보다
훨씬
토속적인
냄새가
풍깁니다.
사비시대는
이곳의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권력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제
성왕은
웅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귀족세력보다는
사비에
뿌리를
박고
있는
토탁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같은
계통으로
형제(형제(兄弟)
국가라는
의식상의
하위개념을
벗어던지고
고조선,
부여로
이어지는
역사의
정통성을
백제가
계승하고자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꾸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북쪽에
있던
부여가
494년
고구려(문자명왕)에게
망했기
때문에
백제
성왕의
국호
변경은
부여의
정통성을
누가
쥘 것이냐
하는
경쟁의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능산리고분군의
무덤벽화를
통해
사비시대
백제
귀족들이
고구려와같은
계통의
부여문화를
지속적으로
계승해온
사람들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흐려져서
자세하게
살필
수는
없어도
사방의
벽면에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백제인들의
생각이
돌틈의
숨구멍에
나타나
있습니다.
벽화가
그려져
있는
무덤은
능산리
1호분입니다.
화강암과
큰 판자돌을
이용하여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사방의
벽면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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