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무왕(600년
- 641년, 42년) 백제의
중흥과 신라에 매복에
의하여 전사한 선왕인
성왕의 숙원을 이루기위한
무왕시대의 동방정책과
국론의 통일을 위한
미륵사 창건과 왕도의
천도계획 등을 알
수 있는 유적 유물을
살펴보고, 당시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본다
::: 익산
미륵사탑
관련
유적유물
:::
미륵사
석탑
왕궁리
5층석탑
- 백제 무왕의 꿈과 설화 -
무왕(600∼641)은
사비시대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영특한
풍모에 뛰어난 지기의
소유자였던 그는
재위 기간 중 신라와의
전쟁을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무왕은
성왕의 관산성 패전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의해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왕이었습니다. 무왕은
비록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다가 귀족들의
정략적인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습니다.
신라에 대한 공격의
단행, 익산천도를
위한 황궁과 제적사의
건설, 거대한 미륵사의
창건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익산천도가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신도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전북 익산 금마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고
나아가 이곳에 사비성이
아닌 또 다른 도성을
경영했는데,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조에는
그의 선화공주와의
연애담과 더불어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 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 미륵사 석탑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년∼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남아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 자형
가람배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동쪽에 남아있는
탑자리가 목조탑인지
석조탑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부근을
발굴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 왕궁평성 -
익산지역은 백제의 별도지
혹은 천도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당시
궁성으로 운영된
곳이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구릉에 자리한
'모질메산성' 혹은
'왕궁평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에 의해서
실시된 부분적인
발굴조사 결과, 남북
450여m, 동서 약
230m의 장방형의
구획과 궁장을
갖춘 행정적 시설이었음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서 종합적인
발굴결과로 볼 때
백제 수도에 두었다는
5부를 의미하는 인각와
등의 유물들과, 궁궐성벽의
노출을 통해서 궁성으로서의
성격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익산의
이러한 백제의 별도설,
천도설은 고산자
김정호가 지은『대동지지』에
"지금의 익산에
무왕은 별도를 두었다"라는
것과 더불어 중국
육조시대의 『관세음응험기에』
보이는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새로이
정사를 운영하였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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