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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백제 역사교실
- 초기백제 문화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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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일시)
기본과정과 클럽과정으로
나누어 운영
(체험장소
및 체험내용)
1.
풍납토성, 몽촌토성,
몽촌 역사박물관
2.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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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1대 온조대왕 - 21대
개로왕(기원전 18년 ~
475년, 494년) 한성백제시대의
역사와 문화관련
유적, 유물을
통하여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
특히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무덤양식인
돌무지무덤의 변천과
고구려 무덤과의
유사성, 백제와 일본의 문화적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의 의미를 찾아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주요 답사지는
백제토성인
풍납토성, 몽촌토성,
몽촌 역사박물관
그리고 백제초기 무덤군인 석촌동,
방이동
고분군을 탐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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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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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목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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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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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은 [삼국사기]의
백제
책계왕
원년(286)과
개로왕
21년(475)에
보이는
사성(蛇城)으로
비정된다.
이
토성은
한강의
널나루(廣津)를
건너는
적군을
막기위한
목적으로
쌓은
성이며,
규모면에서
본다면
왕성(王城)으로도
손색이
없어
백제의
초기도읍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성(蛇城)을
풍납토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대체로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언어적
접근이다.
마치
뱀처럼
길게
깔려
있다고
해서
붙혀진
사성(蛇城)은
우리말로
"배암드리"이다.
이것이
변해서
"바람드리"가
되고
한자로
옮기면서
풍납(風納)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개로왕때의
기록에
보면
사성을
수축하고
주변에
있는
선조들의
고분을
정리하였다고
하였는데,
가락동,
석촌동고분이
이웃하고
있어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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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촌토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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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82년 7월
12일에
사적지로
지정이
되었으며,
88년
서울올림픽
때
종합경기장이
들어서면서
토성이
복원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풍납마을과
몽촌마을이
있었다.
한강의
남쪽에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강으로
유입되는
낮은
하천이
많고
야산들이
바람을
막아주어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그
가운데로
성내천이
흘러
자연적인
경계를
만들어
주었다.
몽촌토성은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하여
형태의
굴곡이
심하고
높낮이도
일정치
않다.
1984년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몽촌토성은
길이가
남북
730미터,
동서
540미터의
마름모꼴이며
총길이는 2,285미터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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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촌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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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남쪽 잠실대교를
지나
성남시로
통하는
큰
길가에
위치해있다.
이
고분군은
이웃하고
있는
가락동고분분,
방이동고분군과
함께
초기
백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더욱이
고분의
형태가
전형적인
고구려의
계단식
적석총을
계승하고
있어
백제의
지배세력이
고구려계통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잠실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약
70-100여기의
돌무지무덤(적석총)이
있었는데
70년대
이후
5기의
유적만
남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제1호,
2호분은
가락동
제1호분의
서북쪽
20미터
위치의
평지에
축조되었는데,
주민들이
경작지로
이용하면서
파괴되어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없고,
유물도
수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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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이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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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동
백제고분군은
백제초기의
무덤떼로
1971년,
75년
발굴이
되어
모두
8기를
확인하였다.
제1호분은
시신을
옆으로
넣어
안치할
수
있게
만든
횡혈식석실분으로
지름이
12미터,
높이
2.2미터이다.
내부로
들어가는
길에
해당되는
연도는
내부
공간인
현실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넓어지고,
천장부까지
깎은
돌을
곧게
쌓았다.
뚜껑돌은
장방형의
큰
판석
4매로
덮여있다.
시신이
머무는
현실은
우물쌓기
방식으로
쌓았는데
윗쪽으로
올라가면서
좁아지고
마지막에
뚜껑돌
한
장을
올려
놓아
마무리하였다.
시신을
놀려놓는
시상대는
크기가
가로
2.46미터,
세로
2.10미터,
높이
30센치미터이고
토기
3점이
발견되었다.
제2호분과
3호분은
아직
발굴을
하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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